한자로 풀어 읽는 도덕경이야기, 동양고전의 정수, 도덕경. 도덕경 1장은 책의 서문과도 역할을 하는 장으로 도가 무엇인가부터 시작하여, 도를 깨닫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깨달음을 얻는 방법 등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를 하고 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도에 대해 노자는 어떻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다 같이 함께 살펴보자.
도덕경의 서술 방식은 노자가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일까? 현재 책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 일 수도 있겠으나, 서문에서 설명하였듯이 이 시대의 리더들에게 바른 정치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들도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주체적인 역할을 하므로 개인적 수양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의 전반에 흐르는 주제는 하늘의 도天之道와 성인의 도圣人之道를 통해 이 시대의 리더들에게 바른 정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이러한 도를 본받아 순리에 따르는 바른 정치를 하라는 메시지임을 잊지 말자.
먼저 1장의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세 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문단에서는 도의 운행과 역할, 그리고 모습이다.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 名可名 非常名
두 번째 문단에서는 도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无名天地之始 有名万物之母
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故常无欲以观其妙 常有欲以观其徼
마지막 문단에서 위 두 문단을 종합해 주고 있는 것이다.
차양자동출이이명 동위지현 此两者同出二异名 同谓之玄
현지우현 중묘지문 玄之又玄 众妙之门
이제 그 의미를 알기 쉽게 한 문장 한 문장 다 같이 살펴보도록 하자.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
도道는 행하는道 것이다. 그러나 그 행함道이 항상常 옳은 것은 아니다非.
우리가 많이 접한 해석은 아마도 이러한 것이 아닐까 싶다.
도를 도라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를 도라 한다면 이미 그러한 도가 아니다. 도를 도라 한다면 이미 진정한 도가 아니다.
이러한 해석에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 내가 따로 뭐라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장자의 제물 편에 따르면, 도는 행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있고, 옛 성현들은 말보다는 실천을 중요시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데에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싶다.
이제 한 문장 한문장 그 의미를 살펴보자.
도가도(道可道) : 도는 행동하는 것이다.
지금 바로 행동하라. 생각만 하고 말만 하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행동할 때 비로소 뭔가를 이룰 수 있다.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고 산다. 하나의 문제를 이리저리 재보고 다시 심사숙고하고, 물론 심사 숙고하는 것이 안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심사숙고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필히 행동을 하여야 한다. 생각만 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도 이렇듯 행동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한 시대의 리더라면 실천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선거에서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을 보고 그들을 판단하고 투표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후보들이 일단 당선이 되면 자신들이 내놓은 공약을 실천하기보다는 그냥 말로 때우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도덕경의 첫 문장이 리더라면 입으로만 백성을 이야기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달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노자시대의 리더들(황제들)도 입으로는 백성을 위한다면서 그에 맞는 정치를 펼치기보다는 자신들의 쾌락과 부귀영화에만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비상도(非常道) : 행한 도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노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비상도(非常道)가 아닐까 싶다.
그러면, 비상도(非常道)의 의미를 알아보기 전에 상도(常道)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도덕경을 해석한 여러 책들에서 상도(常道)를 진정한 도, 영원한 도등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한자는 표의문자로 그 글자에 맞게 해석을 하여야 하는데, 진정한 도는 진도(真道), 영원한 도는 영도(永道)로써, 상도(常道)와는 엄연히 그 의미가 다르다.
그렇다면 상도(常道)는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한 가지 짚어 넘어갈 부분은, 1973년 마왕퇴에서 발굴된 백서 도덕경에는 상도(常道)가 아닌 항도(恒道)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가 주로 읽는 도덕경은 삼국시대 왕필이 해석한 통행본이고, 마왕퇴에서 발굴된 백서 도덕경은 그보다 이전인 진나라 말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글자가 달라지는 분기점에 한나라 문제(文帝)가 있다는 것이다.
도덕경에 있어서 한나라의 문제(文帝)는 필히 알아두어야 할 인물인데, 도덕경을 중히 여겼던 문제(文帝)는 그 통치시기에 비록 북방의 흉노의 침략이 많았으나, 내부적으로 백성들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중국 역사상 가장 낮은 세율의 세금을 거두었고, 그럼에도 국고가 항상 차고 넘쳤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국가의 노역을 제한함으로써 백성들이 편안하게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함으로써, 도덕경에서 이야기하는 바른 정치를 한 황제로 유명하다. 이러한 문제(文帝) 시대를 경계로 그 이전에는 이 책을 노자라고 불렸고, 문제(文帝)가 이 책을 진정한 경전이라 하여 경전의 지위를 부여하여 도덕경이라 명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도덕경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文帝)의 이름이 유항이다. 그래서 황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이유로 문제(文帝) 이후에 발간된 것으로 보이는 판본에서는 상도(常道)로 되어 있고, 문제(文帝) 이전 것으로 보이는 마왕퇴에서 출토된 백서 도덕경에서는 항도(恒道)로 되었다는 것이 현재의 보편적 견해이다.
그러나, 상(常)이든 항(恒)이든 그 뜻에는 차이가 없다. 그 이유는 두 글자 모두 항상이라는 의미를 한 글자로 줄여 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항상은 무슨 뜻일까? 이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도 자주 쓰는 말로 언제나 어디서나 늘 그렇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항상 그렇지, 너는 항상 그래 등으로 쓰고 있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항(恒)은 시간적 개념으로 옛날이나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늘 그렇다는 의미이고, 상(常)은 여기나 저기나 어디서나 등의 공간적 개념이다. 따라서, 항상(恒常)은 언제 어디서나 늘 변함없이 그렇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비상도(非常道)는 무슨 의미일까.
말 그대로 우리가 행하는 도는 상도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가장 큰 특징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행한 성공이 오늘에도 미래에도 성공을 가져올 것이라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또한 어느 한 분야에서 성공한 방식이 다른 분야에서도 똑같이 성공할 것이라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아주 당연한 말인데도 우리는 우리의 성공 경험에 너무 집착하여 세상의 변화를 놓치는 경우를 너무 자주 보게 된다. 과거 수많은 산업 분야에서 선두기업들이 자신들의 성공 전략이나 제품에 집착하여 제때에 변화를 못하고 도태된 사례는 수없이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필름업계의 선두기업 코닥이 먼저 디지털카메라는 만들었음에도, 디지털카메라 시대가 되어 가는 시장 환경을 외면하고 계속 인쇄 필름에 집착함으로써 이제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도태된 기업이 된 사례가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올바른 일을 행하고 그를 통해 업적을 이루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변화하는 세상을 보지 못하고 과거의 성공에만 집착하여 변화에서 도태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세상의 변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그에 맞는 도를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잊지 말자.
노자는 첫 문장을 보다 더 알기 쉽게 하기 위해 두 번째 문장을 통해 보충 설명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명가명 비상명 (名可名 非常名) :
이름(직책)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그리고 그 이름(직책)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
이 문장은 첫 문장인 도가도 비상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보충 설명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도덕경은 이렇듯 첫 문장을 쓰고 두 번째 문장에서 이를 보충 설명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은 인생 속에서 수많은 이름과 직책을 가지고 가지고 살아간다. 개인을 예로 들면 시간적으로는 누군가의 자식으로 시작해서 남편이나 아내가 되고, 다시 시간이 지나면 부모가 된다. 공간적으로는 회사에서는 이 부장, 김과장등, 그에 맞는 직책명으로 불리고, 집에서는 누구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고, 친구들 간에는 누구 누구로 불리듯, 각기 다른 장소에서 그 장소에 맞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렇듯 내가 가지는 이름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 보는 이에 따라, 시간이나 공간에 따라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명가명(名可名):이름(직책)에 맞는 일을 하라.
일상생활에서 자주 듣지만 많이 황당한 말 중 하나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것이다. 주로 낙하산 인사를 할 때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쓰는 말인데, 말도 안 되는 황당한 말임에도 너무 자주 듣다 보니 세뇌를 당해 맞는 말인듯 착각마저 들기도 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높은 자리에 낙하산으로 내려앉아 자기가 맡은 직책이 뭐 하는 자리인지도 모르고, 부하직원들이 뭐 하는지도 몰라 그냥 폼만 잡고, 말도 안 되는 황당한 행동을 하는 경우를 너무 자주 보게 된다.
아마도 과거에는 그러한 일이 더 많았던 모양이다. 그저 황제에게 잘 보이기만 하면 높은 관직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쾌락과 탐욕에 빠져 나라를 혼란하게 만드는 사례는 일일이 찾아보지 않아도 매우 흔하게 발견된다. 노자는 우리에게 어느 한 이름을 가질 때는 그 이름에 맞는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이름을 가지게 되면 그 직책에 맞는 일을 행할 때 비로소 자리도 빛나고 자신도 빛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비상명(非常名): 이름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장소와 시간이 바뀌면 이름(직책)도 역할도 변한다.
상명(常名)이란 무엇인가. 앞서 보았듯이 언제나 어디서나 늘 변함없는 이름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언제나 변화를 한다. 그리고 그 속을 살아가는 우리들 또한 매 순간 변화를 한다. 우리가 그 변화를 외면하고 하나의 이름에 집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집에서는 자식이나 부모로서 그에 맞는 역할을 하고 직장에서는 그 직책에 맞는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본인이 특정 이름이 너무 좋다고 그것만 고집하고 좋아하는 역할만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학교 선생님이 선생님이라는 이름이 좋아 집에 가서도 학생들 가르치듯이 자식이나 부모를 대한다면 어떨까. 군인이 친구 모임에서 친구들을 부하 대하듯 명령을 한다면 어떨까. 개인도 그러한데, 민주사회에서 그 시대의 리더가 리더라는 그 이름이 좋아 그 직책에 집착하여 그 자리를 천년만년 가질 것 같이 온갖 술수를 부린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까.
맡은 바 이름(직책)에 맞게 충실히 행하고, 그 이름에 너무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말고 조용히 뒤로 물러설 줄도 아는 자세가 도덕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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