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로 풀어 읽는 도덕경 이야기. 도란 무엇이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것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게 있을까. 도덕경에서는 도를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까.
도덕경 1장 두번째 부분에서는 도란 무엇이고, 도를 깨닫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해주고 있다.
아래의 원문과 함께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 (无名 天地之始 有名 万物之母)
고상무욕이기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故常无欲 以观其 妙 常有欲 以观其 儌)
자신의 현 상황을 알고 싶으면 객관적으로 항상 주의 깊게 살펴보아라. 모든 일은 그 발생에 원인이 있고 그에 따라 결과가 만들어진다. 현대의 세상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면밀히 관찰하지 않으면 그 원인과 결과를 알기 쉽지 않다. 하늘의 도 또한 이와 같으니, 세상이 생겨나고 운행하는 데는 그에 맞는 법칙이 있다. 그 도를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여야 한다.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无名天地之始 有名万物之母)
천지는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시작하여 만물이 존재하는 현재의 유의 형태로 발전된 것이며, 그 발전의 과정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도덕경을 볼때,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은 2500여 년 전에 이미 세상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상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초기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거대한 폭발, 빅뱅에 의해 시작했다는 이론이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보편화된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는데, 노자는 이미 몇천 년 전에 이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저 놀랄 따름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현재의 만물이 존재하는 유의 상태로 발전해 오는 과정이 단순이 우연의 연속에 의한 진화가 아니라 그 속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지구의 진화나 인류의 진화에 일정한 규칙이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은 현 과학계에서도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아직 증명도 되지 않은 이야기인 것을 감안한다면 참으로 놀라움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본 문장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 무(无)에서 천지가 시작되고, 만물이 존재하는 현재의 유(有)의 세계가 되었다는 표현은 수천 년 전에 하는 이야기로도 놀랍지만은 어느 정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수많은 책들이 그냥 얼버무리고 지나가는 것이 바로 모(母)에 대한 해석이 아닐까 싶다. 내가 찾아본 수많은 책들에서는 "유(有)는 만물의 어머니다" 등의 이상한 해석을 하던가, 아니면 아예 모(母)를 해석해 주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여기서 모(母)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어지는 다음 문장은 아예 해석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두 번째 문장은 아예 해석을 하지 않는 책들도 종종 보게 된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럴까? 그러한 이유는 아마도 한자의 형성 초기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고대한자에서 보면 시(始)는 계집 여(女)와 자궁 태(胎)가 합쳐진 글자로서, 정자가 여성의 자궁에 안착하여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리고, 모(母)는 어머니가 아기에게 젓을 물리는 장면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이를 연결해서 보면 다음과 같이 해석이 가능하다.
첫 번째 의미는 자그마한 정자가 하나의 점에서 자궁에 들어가 10개월이라는 시간을 거쳐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천지가 무에서 시작하여 만물이 존재하는 유의 상태로 돼 가는 과정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두 번째는 이렇듯 무(无)에서 유(有)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 단순히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은 손이 되고 어느 것은 발이 되고, 머리가 되고 결국에는 완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과정이 초기부터 미리 설계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도는 일정한 법칙에 의해 운행된다는 형상화 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첫 문장에서, 아무것도 없는 무(无) 상태에서 천지가 시작하여 만물이 살아 움직이는 현제의 유의 상태가 된 과정을 설명하고, 나아가 그 변화의 과정 속에는 일정한 운행 법칙이 있음을 이야기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그러한 도의 운행 법칙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故常无欲以观其妙 常有欲以观其徼)
예로부터, 아무것도 없는 무无의 시작 상태(无欲)에서는 관찰을 통해 묘(妙)를 알 수 있고
이미 결과가 나온 유의 상태(有欲)에서는 관찰을 통해 요(徼)를 알 수 있다
해석만 봐서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이를 중요 글자를 중심으로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글자는 묘(妙)와 요(徼)이다.
먼저 묘(妙)란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장기나 바둑을 둘 때 묘수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뭔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잘 모르겠는데 수가 나질 않을 듯한 곳에서 돌연히 나타나는 절묘한 한 수를 우리는 묘수라고 말하는 것으로, 바둑이나 장기 이외에도 일상생활 속에서도 자주 쓰이는 글자이다.
그렇다면, 고대 한자에서 묘(妙)는 어떤 의미일까?
묘(妙)를 쉽게 설명하면, 어떤 일의 초기 시작단계에서 왜 그렇게 되는지 잘 모르겠으나 일이 제대로 진행되는 것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조선시대 사람이고 처음으로 자동차를 본다고 가정을 해보자, 말이 끌지도 않는데 시동을 걸면 차가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신기할 것인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모르겠으나 차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상황이 신기하기만 할 따름일 것이다. 그러나, 시동을 걸고 바퀴가 굴러가는 데 까지는 그에 따른 작동원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렇듯 시작에서 끝까지 일이 진행됨에 있어서 우리는 어떻게 되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그 속에는 엄연히 정확한 운행 법칙이 존재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묘(妙)이다. 그리고 그러한 묘(妙)를 아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깨달음이며, 득도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徼)는 무슨 의미일까?
요(儌)는 테두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어떤 일이 이미 형태를 드러낸 상태이다.
따라서 본 문장은 어떤 일이 시작하여 그 형태를 드러나기 까지의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앞서 설명한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를 보충 설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떤 일이 막 생겨나거나, 시작하는 초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无)의 상태라 이것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알지를 못하지만, 시간이 흘러 윤곽이 잡히면 그 정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결과가 다 나온 후가 아닌 일의 초기 단계인 아무것도 없는 무(无)의 상태에서 결과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자동차에 시동을 걸면 차가 움직인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것이 바로 묘(妙)를 아는 것이며, 도의 운행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에 윤곽이 잡히면 우리는 그것을 잘 알 수 있는가? 그 또한 어려운 일임을 잘 알 것이다. 뭔가 결과가 나왔다고 하여 그 결과의 전후 과정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요(儌)를 본다는 것은 일이 마무리된 후에 그 일의 전후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일이 시작되어도 그 징후를 알지 못하고, 그 일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거나, 이미 다 지나갔음에도,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묘를 알기도 쉽지 않지만, 요를 안다는 것 또한 쉬운 것은 아닌 것이다.
다시 간략히 설명하면, 아무 것도 없는 무(无)의 시작 단계에서 묘(妙)를 봄으로서, 차후 진행 과정을 알 수 있고, 윤곽이 잡힌 유(有)의 상태에서 요(儌)를 봄으로서, 그 전후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이 둘을 통해 도의 운행 법칙을 깨달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도덕경 1장의 두번째 부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일의 시작에서 일의 발전 그리고 결과에 이르는 데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의 운행이 이와 같아서 그 원리를 모르면 신기할 따름으로 그저 감탄만 할 따름이지만, 그 원리를 깨 다르면 도의 차후 상황을 예측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를 운용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의 원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노자는 도덕경에서 1장에서 도를 깨닫는 방법으로 면밀히 관찰하는 것, 관(观)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면밀한 관찰을 통해 아직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이미 그 속의 묘를 보고 미래를 예측하고, 일이 진행되는 속에서 그 결과(유)인 요(儌)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다시 풀어보면, 깨달음을 얻는 다는 것은 무에서 묘를 볼 수 있는 것이며, 유에서는 요를 보는 것으로, 이러한 깨달음은 관찰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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